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(문단 편집) == 붕괴 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유고슬라비아의 해체.jpg|width=100%]]}}}|| [[1980년]] 유고 연방을 안정적으로 통치해 오던 [[요시프 브로즈 티토|티토]] 대통령이 87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, 티토의 영도 하에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유고슬라비아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. 티토 사후 유고 연방의 정치권력 체제는 집권여당인 [[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]](SKJ)의 1당 독재를 유지하되, 각 공화국 출신의 대통령들이 1년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통치하는 집단 지도체제로 개헌되었으나, 1980년대 말에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의 공작 아래 세르비아의 연방 내 권력 독점으로 흘러갔고 결국 연방에서 힘 좀 쓰던 세르비아는 연방 내 다른 공화국들을 차별하기에 이른다. 이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민족 및 지역 갈등이 점점 고조되었다. 사실 티토 이전부터 세르비아계는 티토의 형제애와 일치 정책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. 세르비아가 불만을 가진 이유는 간단한데, 유고 연방에서 가장 지분이 큰 나라는 [[세르비아]]인 반면, 티토는 [[크로아티아]]와 [[슬로베니아]]의 접경지대 출신이었다는 점이다.[* 이 때문인지 유고 연방이 해체된 지금도 세르비아 국내에 묻혀 있는 티토의 묘를 철거하고 그의 유해를 본래 출신지인 크로아티아로 이장시키자는 주장도 세르비아 현지에서 제기되고 있다.][* 하지만 서방과의 교류가 더 활발해 더 부유해졌던 북부(크로아티아, 슬로베니아, 보스니아)와 비교적 가난했던 남부 사이의 마찰도 있었다. 북부의 자금 상당수가 남부에 투자된 것 역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.] 게다가 티토는 세르비아에 속해있던 [[보이보디나 자치주]]와 [[코소보]]를 연방 내 자치주로 분리시키기까지 했으니 세르비아의 불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.[* 특히 중세 시기 세르비아 왕국의 초기 강역이자 세르비아 정교회의 종교적 성지나 다름 없었던 코소보를 인구 비율상 알바니아인들이 많다는 이유로 연방 내 자치주로 분리시킨 것에 대한 불만이 가장 높았다.] 정치인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는 고위직으로 오르면서부터 대세르비아주의 성향을 드러내어 여러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부르고 있었다. 밀로셰비치는 1987년 세르비아 대통령에 등극한 뒤 정치공작을 감행하며 세르비아인의 감정에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 반관료혁명이라고 하는 시위를 조직해 몬테네그로와 코소보, 보이보디나 지역의 고위층들을 친 밀로셰비치파 인사들로 교체했으며 1988년에는 아예 1974년 제정 헌법을 무시하며 위헌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. 특히 [[코소보]]와 보이보디나 지역에서 알바니아계와 헝가리계 주도의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두 주의 자치권을 박탈해[* 티토 시절에 연방 자치주로 세르비아에서 떼어낸 코소보와 보이보디나를 도로 세르비아의 자치주로 편입했다.] 타 공화국들이 반발했는데, 이 와중에 연방 주석직을 신설하려 하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. 한편 경제적으로도 유고슬라비아는 1980년대 오일 쇼크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했는데, 이후에 여러 번 외채를 탕감받았으나 여전히 2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끌어안고 있었다. 또한 급속한 물가상승과 두 자릿수의 높은 실업률, 저성장으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.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국가간 경제격차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한 각 공화국 사이의 갈등으로 무위로 돌아가기 일쑤라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. 주로 인구가 많은 세르비아 vs 경제권을 주도하고 있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구도였다. 그 결과 경제 위기가 지속되면서 각 공화국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. 지식인들은 갈등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부추겼으며, 각 공화국의 지도층 또한 불만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기 침체의 원인을 다른 공화국이나 민족에게 돌려 책임을 회피했다. 더 나아가 이들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느낌을 줄 목적으로 다른 공화국을 향해 자극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공화국 이익이 우선이라는 태도를 보였으며, 때문에 갈등은 더욱 고조된다. 이러다보니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내 계파들은 각 지역별로 분열되어서 말만 하나의 정당인 상황이 되었다. 그러던 중 1989년 [[동유럽 혁명|동구권 각지의 공산정권이 속속 붕괴되면서]] 사회 각계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었고, 이에 따라 집권 여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도 대세에 따라 자연스레 일당 독재체제를 종식하기 위해 1990년 1월에 전당대회를 열었다. 그러나 이 당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지부가 1인 1표를 지지한데 반해 타 공화국 지부들은 1공화국 1표를 주장했던 상황이었고 당연히 충돌이 빚어지게 되었다. 이 자리에서 세르비아 대표단은 [[필리버스터]]를 발동했고, [[슬로베니아]] 대표단이 퇴장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에 격분한 크로아티아 대표단이 함께 퇴장하면서 결국 반쪽짜리 전당대회로 전락하고 말았다. 이후 각 공화국별로 다당제 총선을 시행하는 가운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-슬로베니아 간의 갈등이 여전히 지속되었고, 유고 연방은 국가 존속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. 이를 부추긴 대표적인 인물이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였지만 다른 공화국의 지도자들도 이에 질세라 '평화 대신에 우리 민족의 독립' 운운하며 민족 간의 분열을 부추겼다. 보스니아 공화국만 해도 무슬림 지도자 [[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]]가 공공연하게 "보스니아를 독립시킬 수 있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"는 강경 발언을 하여 세르비아계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. [[슬로베니아]]의 [[밀란 쿠찬]]과 [[북마케도니아]]의 [[키로 글리고로프]]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[[탈당]]해서 슬로베니아/마케도니아 사회당을 차렸으며, [[크로아티아]]는 내부 혼란 와중에 [[프라뇨 투지만]]의 [[크로아티아 민주연합|민주 크로아티아당]]이 급성장하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크로아티아지부가 이름을 바꾼 [[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|크로아티아 사회당]]이 수세에 몰렸다.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]]는 [[라도반 카라지치]]의 [[세르비아 민주당(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)|세르비아 민주당]], [[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]]의 [[민주행동당(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)|민주행동당]], [[프라뇨 투지만]]의 크로아티아 자유당[* [[프라뇨 투지만]]은 [[크로아티아]] 국적자였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헤르체고비나주는 사실상 [[크로아티아]] 땅으로 취급될 정도로 [[크로아티아인]]이 절대 다수인 지역이다.]까지 득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부는 소외돼 복잡한 양상으로 치달았다. 특히 [[크로아티아]]와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]]는 총선에서 '''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이 정권을 상실하면서''' 정권 위기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기 시작했다. [[슬로베니아]]와 [[세르비아]], [[몬테네그로]]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출신 인사들이 슬로베니아 사회당, 세르비아 사회당, 몬테네그로 사회당 등을 결성하여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. 그러나 크로아티아는 [[1990년]] [[5월]] 총선에서 [[프라뇨 투지만]]의 '''민주 크로아티아당'''이 63%를 차지하여 '''정권교체'''가 일어나고 말았다.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]]는 한 술 더 떠서 [[1990년]] [[10월]] 총선에서 보슈냐크인의 공화국을 세우겠다는 [[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]]([[보슈냐크인]])의 [[민주행동당(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)|민주행동당]] 35%, [[라도반 카라지치]]가 이끄는 [[세르비아 민주당(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)|세르비아 민주당]]이 30%, [[크로아티아]] 투지만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 자유당이 25%를 차지했고,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은 고작 11% 득표로 처참히 몰락했다. 보스니아는 이후 [[보슈냐크인]], [[세르비아인]], [[크로아티아인]]들이 자기들이 정권을 잡겠다고 [[연립정부]] 수립을 거부해서 '''무정부 상태'''가 지속된다. 결국 대립이 고조되어 가던 [[1991년]] 6월 25일 유고 연방의 여섯 공화국 중 [[슬로베니아]]와 [[크로아티아]]가 유고 연방을 탈퇴, 각자 독립을 선언하면서 [[유고슬라비아 전쟁|내전]]이 발발했고 연방의 붕괴가 시작되었다. 유고 연방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던 [[세르비아]]는 무력 진압을 결정했고, 이로 인해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(JNA)과 연방에서 탈퇴한 슬로베니아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공화국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. 한편 전쟁이 치열해져 가던 1991년 9월에는 남부의 [[북마케도니아|마케도니아]]가 유고 연방에서 탈퇴,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이듬해인 1992년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]]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. 티토 정권 시기 부통령 및 고위 관료를 지냈던 밀로반 질라스(Milovan Đilas, Milovan Djilas) 등 여러 유고 내 원로 인사들이 유고 연방의 분열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전쟁을 중단하고 공화국끼리 서로 양보하여 통일을 유지할 것을 호소했지만,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질라스는 [[1995년]] 자신의 자택에서 의문사 이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.[* 사실 정치적 권력이라도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이 당시의 질라스는 티토 시절 티토의 독재통치에 저항하다 이미 유고 연방 시기 집권 공산당에서도 축출당하고 정치적 권력을 잃어버린 무명의 노인이었다. 또한 이미 1980년대 중후반부터 각 공화국 가릴 것 없이 강성민족주의가 들끓으며 유고 내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했던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 전 대통령과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전 대통령,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전 대통령, 마케도니아의 키로 글리고로프 전 대통령 등 구유고권 국가들의 지도자들 역시 그를 헛소리 하는 이상한 사람 취급했고, 유고 연방 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보스니아 내전에서 전쟁범죄들을 주도했던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 역시 그를 회색분자 겸 캐캐묵은 공산주의자/이상주의자로 몰아가며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고 하였다.] 사인이 [[심장마비]] 및 [[노환]]이었다는 세르비아 정부 측의 공식발표가 있었으나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